카테고리 없음

며칠이 지나고, 갑작스럽게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한국 지원금 2025. 4. 21.

며칠이 지나고, 갑작스럽게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계시던 분이 보이지 않으니 정원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허전해졌다. 바람이 벤치 위를 스치듯 지나가고, 그 자리에 남겨진 낡은 시집 한 권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책을 집어 들었다. 표지에는 흐릿하게 남은 이름 석 자, 그리고 누렇게 바랜 꽃잎 하나가 책갈피처럼 꽂혀 있었다. 책장을 넘기자 군데군데 손때가 묻어 있었고, 가장 많이 접힌 페이지에는 작은 글씨로 누군가의 필체가 적혀 있었다.

“그대여, 봄이 다시 오면 꼭 이 자리에서 만나자. 늘 기다릴게.”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마치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할머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따뜻한 봄바람이 벤치를 어루만지듯 살며시 불고 있었다.

며칠 뒤, 관리사무소 게시판에 붙은 공지를 통해 할머니가 요양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다는 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결국 병원을 수소문했고, 작고 조용한 병실 한 켠에서 여전히 같은 시집을 들고 계신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 그 책, 잘 있었지?”
할머니는 나를 보며 천천히 웃으셨다.
“그 책은 너한테 맡기고 싶단다. 이제는 눈이 잘 안 보여서 읽기 어렵지만, 누군가 이 시들을 계속 읽어준다면 참 좋겠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병실 한가운데 울려 퍼지는 작은 시 한 구절을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할머니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쉬셨고, 마치 그 시가 아주 오래전 잊었던 기억을 다시 데려다주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날 이후, 나는 벤치에 앉아 가끔 그 시집을 읽는다. 혼잣말처럼, 때로는 누군가 듣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누군가 곁에 없더라도, 그 사람을 향한 기억은 남는다. 말 대신 손을 꼭 잡아준 따뜻함, 아무 말 없이 곁을 지켜준 믿음, 그 모든 것들이 시가 되고, 삶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 아주 먼 훗날, 누군가 이 벤치에 앉아 같은 책을 펼친다면, 이 이야기 또한 계속될 것이다.
바람이 다시 불고, 나뭇잎이 사각거릴 때면 그 사랑의 흔적은 조용히 살아날 것이다.

 

 

 

 

댓글